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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月27日
3月27日 (혼자생축설)  


오랜만에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게 건강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웃음기 담긴 말투로 응,하고 대답했다. 누나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전화기에 이상이 생긴건가, 하고 누나의 이름을 몇 번 불렀다. 그러고도 응답이 없자 수화기를 놓으려고 하는 순간, 고백하는 듯한 누나의 목소리가 그 행동을 저지했다. 어제 이혼서류를 제출했단다. 나는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잘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누나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것을 뻔하게 알면서도. 누나는 내게서 누나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실망했는지 의례적인 끝인사로 잘 지내라는 얘기들을 늘어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처음 누나의 전화를 받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그 낮고 어두운 목소리에, 대충 할 이야기는 짐작하고 있었다. 난 그녀를 달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누난 나보다 강하잖아. 난 누나보다 약하잖아. 그녀의 얘기를 듣다보면 나 혼자 또 감상적이 되어버려 굳이 끄집어내지 않아도 될 추억까지 끄집어내게 될 것 같아서, 또 혼자 아파하게 될 것이 뻔해서 달래지 않았다. 

아파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도모토쯔요시라는 이름의 지극히 평범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세번째 사람을 찾았다. 사람을 픽픽 쉽게 믿어버리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툰 나를 조건없이 좋아해주는 착한 사람을 찾았다. 그러니까 이젠 지나간 일로 마음 아플 필요 없어.


나는 수랍장에서 비스킷을 꺼내 한 손에 든 후 다른 손으로 개사료가 들어있는 봉투를 꺼낸 뒤 수랍장 문을 닫았다. 어차피 매일 꺼낼 건데 왜 굳이 까치발을 들어야 닿을 수 있는 높은 수납장에 놔두는 거냐고 전 애인이 물어봤었다. 난 웃으며 그냥, 그러고 싶어서. 라고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뭐든 높은 곳에 두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 매일 까치발을 드는 사이 어느새 커져있는 나를 발견하는 게 아닌가- 하고. 작은 키의 컴플렉스 가 은근히 투영되어 있는 습관에 그걸 들킬까봐 부끄러워서 그 이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스물일곱인 지금에도 내 키는 166에 멈추어 있다.

빨간색으로 겉에는 작게 암소가 그려져있는 플라스틱 그릇에 개 사료를 일정량 부었다. 어느새 그 적당량이라는 것은 수치로 재어도 될만큼 그 정확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켄시로와 지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켄시로- 하고 부르자 꼬리를 흔들며 가히 광속의 속도라고 칭할 만큼 빠른 속도로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켄시로는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정말 못생겼다. 진짜다. 뭐 못생긴 애가 크면 예뻐진다는 헛소리를 주워듣고 못생겨도 날 죽어라 따르는 애를 덥썩 샀는데 어쩜 얘는 클수록 못생겨간다. 내 발치까지 온 켄시로를 번쩍 들어 식탁 쪽으로 데리고 가 식탁다리 밑에 사료그릇을 놓자 허겁지겁 먹는다. 배고프지 않을텐데. 나도 식탁위에 비스킷을 올려놓고 어젯밤 목말라서 나와 마시다 만 우유가 놓여져 있음에 한 번에 쭉 마셔버렸다. 미지근한 게,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조그마한 초코렛이 박혀있는 비스킷을 베어물며 그 미지근한 우유맛을 입 속에서 지워버리고자 했다. 우유는 차갑든 미지근하든 뜨겁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 딸기우유만 빼고.

실은 딸기우유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소학교 때 편도선 수술을 했었는데, 수술 후 목 안으로 뭘 자꾸 넘기는 게 좋다는 의사의 말에 아빠는 껌을,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누나는 딸기우유를 잔뜩 사다가 병실 냉장고에 넣어왔었다. 그 때 먹었던, 전부 마셔야했던 딸기우유는 지금도 불쾌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럼에도 전 애인이 딸기우유를 좋아했다는 것만으로 딸기우유의 맛은 아니지만 딸기우유라는 자체를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영향이나 받고, 나란 사람이 이렇다.


지금 켄시로의 밥그릇도 전애인이 선물했다. 그 이름은 코이치였고, 공교롭게도 나와 성이 같아 친한 사이가 아닐 적에도 서로 이름을 불렀었다. 그는 차갑고 다정했으며 완벽했다. 그건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어째서인지 난 그의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과거형이 되어버린다. 그는 나와 헤어진 지금에도 달라진 게 없는데 말이지-

실은 내가 그렇게 미련을 두고 있는 투로 말하고 있는 코잇찌,라는 사람하고의 아픈 기억은 별로 없다. 그냥 이별했다는 자체만으로 조금 슬플 뿐이다. 난 지금 행복하고 그도 행복할 거다. 음, 그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인기인이었고 그야말로 젠틀한 이미지였다. 잘생긴 외모 때문에 나와 사귈 때에도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질투하지 않았다. 아니 질투하지 않은 척했다. 질투하면 그 모습에 그가 질려 떠날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지금에사 하는 생각이지만, 실은 그도 많이 약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다정한 걸 표현하지 못했던 것 뿐인데 나는 그가 지독히 계산적으로 감정을 컨트롤하며 친한 사람에게만 상냥하게 대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그 친한 사람 안에 속한다고 착각하며 기뻐했었다. 뭐, 조금 빗나가긴 했지만 그가 진짜의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사람이 나였다는 점에선 여전히 기쁘다.


그는 나에게 이별을 고하기 전, 고백하듯 말했다.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뭔 뜬금없는 소리냐 하고 웃었지만, 그는 꽤 진지했던 것 같다. 학생 때 고양이를 산 적이 있었는데 너무 작고, 귀여워서 잘 안아주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얘가 이런 겁쟁이 밑에서 크면 행복하지 못할 것 같고 또 이러다가 외로움에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두려워져서 고모에게 줘버렸다고 조곤조곤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제와서 보니 네가 그 고양이를 닮아있더라고- 하고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헤어지자...

4년 사귄 연인과의 결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내가 스물 두 살 때의 일이었다.


지금 나는 연하의 연인과 사랑하고 있다. 이제껏 내 애인은 그 애까지 합쳐 세 명이었는데, 첫번째 애인은 연상에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상당히 미남형이었다. 그의 이름은 기무라 타쿠야였는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꽤 오래 동거한 여자가 있었다. 내가 17살 때인가, 그 쯤에 사귀어 1년이 조금 넘어 깨졌다. 상당히 잘생기고 능력도 좋고 부족할게 없던 남자라 그런지, 후에 들어보니 그 동거녀와는 8년인가 9년인가 살다 다른 여자랑 바람나 지금은 딸 둘 있고 잘 산댄다.

두번째가, 도모토 코이치. 그와 깨진 후 바로 사귀었던. 18살 때의 사랑. 동갑이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라 알던 사이였다. 그 역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래도 언뜻 차가워보이는 분위기 때문에 아무로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사귄지 5년이 조금 덜 되서 깨지고는, 이별 후 반 년 뒤에 다른 여자를 사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진심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자 쪽이 나 같은 성격이 아닌 이상 조금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반 년 후 스물 셋의 여름날, 지금의 애인. 그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연하다. 그럼에도 왜 항상 먹히는 쪽은 나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살짝 어른스러워 보이는 이번 애인에게 나, 다섯 살이나 형아인데 작은 여자애 다루듯 취급 당하고 있다.



Pppppppp-

어느 새 마지막 비스킷까지 입에 넣고 손을 탈탈 털고 있던 나는 전화소리에 빠른 걸음으로 거실 쪽으로 가 커다락 TV 옆에 가려진 짙은 남색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쯔요? 나, 진.]
"아, 어젠 잘 들어갔어? 마누라가 뭐라 안 글든? 바람핀다고 오해하겠다."
[오히려 마누라 쪽이 바람이잖아(웃음) 그 여자랑은 그냥 친구잖아.]
"세후레?"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 곧 그의 웃음소리는 차들의 빵빵거림과 섞인다. 또 출근하다가 전화한거군. 법에 걸린다고 뭐라 그래도 결코 그만두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걸지도. 젊은 그는 나와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내가 그의 나이에 가지지 못했던 느낌을 그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출근할 회사도 있고, 기다리는 아내도, 그리고 나라는 애인도 있다. 나는 몰래 그를 시기한다.

[우리 쯔요시, 나 없으면 심심해서 어떡하나-]
"예, 난 켄시로랑 놀란다. 너 앞으로 내 집에 오지 마!"

그러니까 그가 또 웃는다. 진짠데. 너 앞으로 오지마. 그가 1년쯤 전에 나에게 스쳐가듯 '나, 결혼해도 돼?'라고 물어왔었다. 그래서 왜냐고 물으니까 여자 가슴이 좋댄다. 미친 놈. 그러고 시집이나 가버리라 그러니까 진짜 결혼하더라. 뭐 내가 그 가슴을 만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그래도 코이치는 내 가슴 굴곡이 섹시하다 그랬는데 말이지.(웃음)

[사랑해.]
"그래."
[에, 넌 '나도'라던지 '나도 사랑해' 같은 거 안 하냐?]
"그래, 나도 사랑해."

엄청나게 당연한 말투로 툭 내뱉자 나 삐질거라고 오바하더니, 회사에 가까워졌는지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애정표현에 익숙하지 못한 나와 틈만 나면 사랑한다느니 닭살스런 소리를 삑삑 해대는 아카니시와의 사랑은 아이러니와 아이러니가 만나 만들어내는 삐그덕거리는 하모니의 연속이다.

그래도 행복하다. 나는, 아직까지 사랑받는 사람이다.
# by 미스터다스 | 2006/03/26 18:16 | 망상삽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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